- 작품명
- 그리운 아버지! 그리고, 부산일보…
- 작품 설명
난 영도에서 태어나 30여 년을 그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성장과정을 거쳤다. 내가 약대 졸업하고, 약국 개업할 무렵, 우리 삼형제 모두들 내가 사는 주변으로 옮겨 왔었다.
지금은 코로나19 유행 3년 동안 너무 과로한 탓에 건강상 이유로 약국을 접은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현재는 시간도 나고, 그동안 돈 버느라 찌들렸던 내 공허한 마음에도 휴식이 찾아와 다시 펜을 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잠재되어 있던 나의 내면을 파헤치듯, 지금은 글 작업에 집중이 될 것 같아 다시 펜을 들게 되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5년 전, 뇌종양 진단을 받고, 칠순잔치는 치른 후 5년을 더 사시다 잠자는 듯한,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떠나셨다.
살아생전 자신의 생일을 철저히 챙기고, 주변에 사람들 모이는 걸 워낙 좋아하셔서, 그냥 원하시는 바 생신잔치(칠순)를 치러드렸다.
수술을 하지 않은 탓에, 자기 명대로 사시다,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그렇게 잠을 주무시듯, 편안히 세상을 뜨셨다.
난, 아버지의 임종 모습을 죄다 지켜보았다. 마침 약국이 휴일이라, 마지막 떠나시던 모습을, 딸과 무언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 세상으로 떠나가셨다.
아버지는 위로 아들 둘, 아래로는 딸을 두 명 두셨다. 아들 둘은 직장 따라 늘 외지에 나가 있었고, 남은 딸둘에게 모든 말을 다 하셨다.
그리고, 우린 옛 시절부터 오로지 부산일보만 구독하여 읽었기에, 그 시절 흐름상을 다 읽고 있었다.
덕분에 집에 앉아서도 바깥세상 돌아가는 걸 다 느끼면서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냈었다.
당시 일과에 지친 아버지께서 저녁에 퇴근해 돌아오시면, 여동생에게 늘 신문을 읽게 하셨다.
나도 가끔 읽긴 했지만, 그건 하루 종일 노동하고 집에 돌아온 후, 자신에 대한 피로회복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 시절엔 신문에 한문 글자도 꽤 많았었다.
여동생도 나도, 웬만한 건 한문을 쓸 줄은 몰라도, 다 읽을 줄은 알았다.
어느 날 보니까, 한문이 다 사라졌다. 늘 편안한 마음으로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문 글자가 죄다 사라진 것이었다. 젊은 MZ세대에 대한 배려였을까?
우리 세대는 기억 속에 가물거리던, 기본 한문 글자마저 다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난 40여 년 전, 부산일보 구독란에 수필 글을 두세 번 기고한 적이 있다. 당시 두 번의 글이 부산일보 구독란에 실리게 되었다.
그 기회로 난 많은 사람들과 만남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장애인이었던 탓에, 이후로는 일체 글을 기고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형편상 쉽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나의 판단과 결정이 과연 옳았던 것이었을까? 지금도 가끔씩 생각해보곤 한다.
난 유년적 기억을 한 번씩 떠올려본다.
우리 자매가 열두세 살 즈음에,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시면, 늘 샤워를 하고, 발을 깨끗하게 씻고 완전히 말린 후 딸둘에게, 발가락 사이에 면봉으로 무좀 물약을 발라달라고 하셨다.
행여 자신이 약을 쏟을까 봐서 하는 조심스러움이었지만, 그 시절엔 아버지의 말씀이 바로 명령과도 다름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셨다.
나는 소아마비 장애가 있어서 못 해줬지만, 여동생에게는 늘 거의 매일이다시피 아버지 무릎에 올라가, 무릎, 발을 밟게 하셨다.
행여 넘어질세라, 여동생은 장롱문을 꼭 잡고 불평 한마디 없이 그 일을 반복하였다. 나는 해줄 수 없었지만, 여동생이 그 역할을 다 해주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가끔씩 가족들 모르게 용돈(비상금)을 살짝 쥐어주시곤 하셨다. 자식에 대한 차별이 아닌, 장애인 큰딸이 만약에 긴급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적, 혹 돈이 필요치 않았을까 하는, 깊은 배려였던 것 같다.
난 정말 우리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었다.
그 옛날, 잊혀졌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
—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
잠깐 방송을 타다가, 금지곡이 되어버렸다.
난, 이 세상에 태어남에 조금의 원망 같은 게 전혀 없다. 본래, 태어났을 적부터 나의 모습이 이러했을 것이라고, 길들여지듯 그렇게 세상을 살아왔다.
내 나이도 머잖아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난 영도에서 태어나서, 25년 정도를 그곳에서 살았고, 고등학교를 나왔다.
가난한 고난 기간을 거쳐, 난 비로소 약대 진학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숨겨진 내면의 진학 학과는 문예창작과였는데, 먹고사는 게 급급하던 시절이라, 난 약대에 진학했었다. 난, 지체 3급 장애인 약사다. 여동생이 20대 청춘을 다 포기하고 내 대학생활 4년의 뒷바라지를 다 해주었다.
대학시절 에피소드를 잠시 옮겨보려 한다.
여동생이 내 대학시절 4년을, 등하교는 물론, 오로지 학교에 종일 머무르면서, 강의실 옮겨다닐적마다 도움을 줬었고, 1, 2학년 적에는 교양과목 강의가 포함되어있어서, 강의실이 아닌, 건물과 건물 사이로 늘 옮겨다녔었다.
부득불 동생이 하루종일 학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강의를 듣는 동안에는 동생은, 기다림이라는 지겨움을 이겨내기 위해 대학 캠퍼스 곳곳을 구경하고 다녔었다.
그렇게 4년이라는 시간을 언니를 위해 희생했었고, 화려했었던 20대 젊은 청춘은 죄다 언니를 위해 희생을 했었다.
지금도 동생이 가끔씩 옛 시절을 떠올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강의실 밖에 대기 중인데, 안 기다리게 하고 내가 바로 나가면, 그날 점심 메뉴는 우동... 많이 기다리게 한 날은 돈까스... 그 시대상엔 돈까스가 최상의 고급 메뉴였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오직, 오로지 부산일보만 구독해서 읽고 있다. 아버지께서 일과 마치고, 약주 한잔 얼근하게 취해서 오시는 날에도, 깔끔한 성격 탓에 꼭 씻고 주무셨다.
난 그런 아버지의 냄새가 전혀 싫지 않았다.
그래도, 꼭 부산일보 기사만큼은 동생더러 읽게 하시고는, 잠에 곯아떨어지셨다.
잠든 걸 확인한 후, 동생과 나는 아버지의 방을 벗어나왔다.
지금은 신문에 한문 글자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한문이 있어서, 읽기가 좀 어려웠다. 그렇게 아버지께 물어보면서, 한문을 익혔다.
아버지는 어린 두 딸에게 무언의 감정으로, 엄청 사랑을 쏟아주셨다.
여동생 왈!
언니야!
그래도 우리가 아버지 덕에, 한문을 잘 쓰지는 못해도 읽는 것은 많이 익혔다…
종종 기억 속의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어렸을 적엔, 아버지께 말투도, 말씨 하나하나도 엄청 조심스러웠는데, 아버지가 병이 나신 이후에는 마음이 완전 어린 아기처럼 변하셨다.
까닭에, 목청을 높여 아버지를 많이 나무랐던 기억이, 지금 이 나이쯤에는 왜 이리 후회스러울까?
사랑했었던 나의 아버지!
왜 그리 부녀지간에 터놓고 사랑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렇게 저 세상으로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을까? 내내 후회감이 한없이 밀려온다.
아! 그리운 아버지…
오늘도 아버지를 소리없이 되뇌여봅니다.